남한산성
인조 14년
조선을 침략한 청의 대군이 단 며칠 만에 도성을 점령하고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이 막히자 왕과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마침 뜻이 다른 조선의 두신하가 각자의 위치에서 나라의 위기를 바라본다.
나라의 안위보다 당장의 먹고 살길이 급했던 나루터의 뱃사공을 가차 없이 자른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의 치혈한 논쟁이 시작된다.
핍박을 피하려면 소현세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청의 요구를 수용하자던 최명길의 주장은 김상헌과 조정 신료들의 반대로 묵살되고 수어사 이시백을 찾아가 군사력을 살피던 김상헌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마주한다.
그때 마침 묘안을 제시하는 대장장이 서날쇠를 눈여겨보고 다음날 군사들을 걱정하는 왕에게 김상헌은 서날쇠의 말대로 제안해 왕의 신임을 얻는다.
한편 최명길은 세자를 청으로 보내는게 두려웠던 왕을 위해 청의 장수 용골대를 찾아가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커녕 청의 황제가 직접 조선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명길과 김상헌은 또다시 논쟁을 펼친다.
이번에도 최명길의 주장은 묵살되고 그렇게 청군과의 전투가 시작된다.
막강한 군사력과 숫자의 밀력된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무기는 낡고 무뎌져 전투하기 어려워져 서날쇠는 김상헌에게 무기의 교체를 간청한다.
이번에도 김상헌은 서날쇠의 말대로 왕에게 보고해 또다시 신임을 얻는다.
낡은 무기를 새로이 정비하고 다시금 전투에 나선 군은 수어사 이시백의 활약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다들 작은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최명길의 속은 더욱더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남한산성에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군사들의 식량들은 물론 말의 먹이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군사들의 가마니를 빼앗아 말을 살리자는 영상과 달리 모처럼 최명길과 김상헌은 한뜻을 모아 간청하지만 왕은 말을 살리기로 해 사람들의 가마니를 빼앗는다.
백성들은 이러한 상황이 갑갑해지고 게다가 근왕병들에게 보낸 전령이 죽고 삼전도에는 칸의 군대가 몰려오는 등 전국의 점점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지못해 최명길과 함께 용골대를 찾아간 영상도 그들의 군사력과 태도를 보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치욕만 당하고 돌아온 영상은 처벌을 면하고자 무리한 전투를 제안하고 전략도 전술도 없는 영상의 고집대로 결국 허공에서 일으킨 전투는 끝내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일로 영상대신 체찰사 직을 맡게 된 김상헌은 다시 한번 근왕병들에게 격서를 보낼 것을 왕에게 제안하고 김상헌은 왕의 옥새가 찍힌 격서를 서날쇠에게 주고 그를 성외곽에 보내 군보강에 기대를 건다.
한편 정초를 맞아 명을 향해 스스로 목을 조아리는 조선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이 모든 걸 이미 조선에 도착한 칸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청과 맞서길 주장하던 김상헌과 신료들의 반대가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팽팽히 맞서고 그리고 얼마 후 자신들을 외면하는 조선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칸도 최후통첩을 보낸다.
격서를 보낸 지 며칠이 지나도록 다른 군영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김상헌의 입지도 좁아지고 아무런 소식이 없던 것에는 허탈한 이유가 있었다.
적군에게 포위던 성을 가까스로 벗어나 격서를 전해야 하는 군영에 맞게 도착해 있는 서날쇠 지만 청군에 위세에 떨고 있던 그들은 격서를 들고 온 서날쇠를 제거하려 들고 허튼짓을 벌이다 그만 청군에게 발각되 전멸하고 만다.
김상헌이 그토록 기다리던 근왕병들의 봉화는 결국 불타오르지 않았고 궁지에 몰린 왕은 신하들에게 답서를 쓰게 한다.
자세한 상황을 알리 없던 신료들은 적군이 코앞에 다가온 줄도 모른 채 또다시 최명길의 답서를 두고 갈등을 하는 동안 청의 공격이 시작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으며 산성은 순식간에 청군에게 장악된다.
최명길은 항복이나 다름없는 왕의 답서를 들고 서둘러 칸에게 달려가고 그제야 공격을 멈춘다.
결국 47일 만에 곤룡포를 벗고 성을 나온 왕은 삼전도에 도착해 마치 칸 앞에 힘없는 백성인 양 무릎을 꿇는다.
최명길은 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왕을 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끝내 치욕스러운 왕과 조선을 거부한 김상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수많은 백성을 잃고 무사히 왕좌를 보전받은 왕은 을씨년스러운 궁으로 돌아온다.
치욕스러운 역사 속 두충신의 대립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작가의 5번째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머문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렸고 출간 10년 만에 6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김훈작가의 역사소설은 인물에 몰입시켜 강한 울림을 선사하는 매력이 있듯 이영화에서도 두 명의 충신이 대립하면서 나타나는 대립구조와 긴장감 마지막 왕을 보좌하며 눈물을 흘리는 충신과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자결하는 충신의 모습이 아주 잘 표현된 것 같다.
김훈작가는 시대나 사건을 먼저 선택하지 않고 내가 얘기하고픈 주제에 맞는 시대를 찾아 소설을 집필한다고 한다.
병자호란을 소설로 집필하게된 이유는 사람들은 모두 승리한 역사만을 기억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역사, 승리하지 못한 역사도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어리석은 논쟁으로 망가뜨린 47일
남한산성이 배경이 된 병자호란은 그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까지를 그린영화로 47일 동안 왕과 신하들의 갈등과 잘못된 선택들로 끝내 청에게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대부분의 영화는 승리를 하는 역사들을 보여주지만 영광그러운 역사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모멸과 실패한 역사 또한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 또한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왕과 신하의 우유부단함과 백성들과 군사들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결정하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은 백성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군사들의 고충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머리로만 생각해 낸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우리나라 정치와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